잔스카르에서의 날들은 공허한 것이며 동시에 현실적이며, 때로 환상 같은 꿈속이었다. 신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었다.강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신묘하게 굽이친 산세가 숨을 고르는 곳에 안착한 안무(Anmu)마을은 우리같이 지친 여행객을 다독이기에 충분했다. 다바(여행자 휴게소)의 여자 주인은 어릴 적 시골 어머니처럼 음식 솜씨가 좋은데다가 매우 따뜻하고 다정해서 만족했다. 어린 아이는 이리저리 나비를 좇고 주인은 오랜만에 온 손님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녁을 먹자 지금까지 겪었던 고생이 거품처럼 가라앉았
싱골라에 발자국을 남긴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했다. 인생은 분명 진행형이지만 누구도 그 길을 예측할 수 없다. 젊어서는 오직 자기 앞에 떨어진 이익만 줍는 데 시간을 소비했다.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은 사치이며 시간낭비라 생각했던 내가 생각을 바꾼 것은 자전거여행의 영향이 컸다. 마치 늙은 별이 마지막 빛을 우주에 남기듯, 오래된 느티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죽이며 굵은 뼈를 유지하듯, 자전거 여행은 내 안에 침적된 고정관념을 깨끗이 닦아내 버렸다.자전거로 오지 여행을 하며 높은 고개를 넘은 것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싱골라는 특별
4년 전이었다. 당시 나는 자전거로 인도 마날리(Manali)를 출발해 5일간의 여정 끝에 라다크의 레(Leh)에 도착해 여독을 풀었다. 레를 떠난 나는 스리나가르(Srinagar)와 레의 중간에 위치한 카르길(Kargil)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스리나가르로 갈 것인지, 아니면 잔스카르(Zanskar)의 파둠(Padum)으로 갈 것인지를 놓고 밤새 고민했다.결국 체력적인 문제를 고려해 잔스카르의 파둠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스리나가르로 갔다. 귀국한 뒤 언젠가 꼭 잔스카르의 중심인 파둠으로 여행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오후 빛이 강해질 즈음 한세에 도착했다. 마을은 참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열 가구 내외가 사는 작은 마을임에도 오래된 전설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는 여기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양치기가 머물렀을 법한 풀밭에 터를 잡았다. 대원들이 텐트를 치는 동안 저녁식사에 필요한 감자를 얻기 위해 농가를 찾았다. 주인을 부르자 한 늙은 농부가 나왔다. 농부가 내 말을 이해하는 데까지 어지간히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집 안으로 들어간 농부는 한참만에 나왔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감자 서너 개만 달라고 했는데 어지간히 큰 자루에 감자를 가
히말라야의 풍경이 경이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땅이 솟구치며 산이 생겼고 또한 강이 만들어지는 이치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전거 여행 내내 우리는 각자 새기고 있는 감흥을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미루어보건대 감화의 크기와 맛이 다를 뿐, 심장으로 느끼고 가슴으로 소화시킨 감흥은 비슷했을 것이다.아름다운 고원의 마을 나코를 떠나면서 라하울·스피티는 척박하고 황량한 히말라야 고원으로 바뀌어갔다. 기이한 옷을 걸친 도도하고 아름다우며, 색정적이며 신선의 기품을 닮은 히말라야 고원의 경치에 취해 갔다. 길옆의 작은 사원을 발견할
인도 중북부의 라하울(Lahaul)과 스피티(Spiti)는 히말라야산맥과 얼굴을 맞댄 지역이다. 워낙 오지이다 보니 여행객 중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때문에 여행 내내 빈객으로서의 쓸쓸함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놀랍게도 히말라야가 시작되는 지역인 심라까지만 하더라도 아열대 기후와 몬순으로 매일 비가 내리지만, 산줄기 두어 개만 넘어 안으로 들어가면 건조하고 쾌청한 날씨로 바뀐다. 히말라야 경계지역 특유의 기상 변화인 것이다. 2015년 7월 22일, 인천공항에서 일행과 만났다. 문정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는
리보르네는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였다. 중세의 풍모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데다 큰 도시에서 보기 힘든 소박한 면이 있었다. 광장 한쪽에 높은 첨탑의 성당이 있고 주변에 큰 난전이 형성돼 마치 이슬람권 국가에서 모스크 주변의 바자르를 보는 것 같았다. 포도밭이 많아서인지 농부들이 집에서 직접 만든 와인을 큰 통에 담아 와서 탁자 위에 치즈와 올리브를 올려놓고 와인 잔에 담아 한 잔에 얼마씩 팔고 있었다. 우리네 식으로 말하자면 집에서 빚은 동동주를 들고 나와서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안주라 해봐야 깍두기처럼 썰어놓은 치즈나 질펀하
2014년이 며칠 남지 않은 12월 말, 준비한 것을 챙겨 인천공항으로 갔다. 비행기에 탑승해 영국의 히드로공항에서 환승 후 파리에는 저녁 늦게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서 아내에게 바라는 바는 없었다. 다만 경비를 최대한 줄이는 데 작은 목표를 두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여행 시작부터 아내에게 하지 않았다. 여행 중간 중간 몸소 그것을 보여 주리라 마음먹었다. 파리 드골공항 한편에서 짐을 해체해 자전거부터 조립했다. 부속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챙겨 여행 내내 아무런 고장이 없기를 바라며 조립을 하니 거의 밤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별
파미르고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힌두쿠시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엄청난 위용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석탄가루로 덮인 것 같은 검은 산맥 뒤로 흰 눈을 뒤집어 쓴 힌두쿠시는 더욱 신비롭고 장엄했다.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 힌두쿠시산맥이 내뿜는 빛에 도취되었다.고원으로 들어갈수록 검은 산줄기가 끝없이 좌우로 펼쳐졌다. 힌두쿠시는 점점 그 검은 산맥 뒤로 자취를 숨겼다. 해발 4,500m가 넘는 고개를 넘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원체 높은 고도의 고원을 통과하고 있기에 두산베에서
한번은 이런 경우도 있었다. 긴 오르막을 올라 평지로 이어지는 길을 달리는 중 가게를 발견했다. 마침 망고주스도 거의 떨어진 상태라 주스도 사고 쉬기도 할 겸 자전거를 세웠다. 가게 안에는 여인이 혼자 있었는데 내가 가까이 갔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소리를 내어 인사를 하고 망고 주스를 찾는데도 여인은 엉뚱한 곳만 쳐다본 채 아무 응답이 없었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세히 여인을 보니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거기다가 내가 얘기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걸 봐서는 귀도 먹은 것 같았다. 탁자 앞에는 다른 사람들이 놓고
길고 거친 날개를 단 독수리처럼 산맥 꼭대기로부터 기운차게 내려오던 갠지스가 숨을 고르는 계곡 입구에 이르자, 동굴 속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듯 사방이 환했다. 숨을 고르고 문득 앞을 보니 길은 끊어져 뵈지 않고 대신 벌건 흙벽을 드러낸 절벽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산사태였다. 그 모습이 너무 장관인 나머지 감탄이 나왔으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낙담하여 어떻게든 해보려던 의지는 꺾이고 심기도 병자처럼 약해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숙소를 출발할 때 충천하던 사기는 완전히 바닥
조각난 뼈와 살점들이 느슨함을 유지한 채 정신은 꿈의 한가운데서 한가함을 즐기고 있을 때 우울하고 날카로운 경적이 창문을 때렸다. 나는 아이가 경기를 하듯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은 짧고 시원했지만 꿈이 사라진 공간이었다. 정신을 다시 긴장과 불안이 장악하고 몸은 경직되었다. 문을 열자 무거운 습기와 냉랭한 기운이 버무려진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래층에서 아침 준비를 하는지 허파를 녹일 것 같은 냄새와 연기가 올라왔다. 창밖으로는 농부들이 가축을 몰고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버너에 불을 피우고 어제 먹다 남은 수제비를 데웠다.
참빠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혹심하게 육체를 다그쳤는지 침대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늦도록 잠도 이루지 못했다. 이상한 꿈을 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는 등 밤 12시가 넘도록 열병을 앓았다. 계속 물을 마시며 끓어오르는 열을 식혔지만 이번에는 모기가 들러붙기 시작했다. 불을 켜고 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피를 잔뜩 빤 모기들이 통통해진 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밤은 질긴 실과 같았는데 나는 거기에 묶여 기진맥진했다.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편안하게 잠들 기회를 줄 것 같지 않던
리쉬캐시에서 시작한 자전거 여행은 대략 900km. 우따르카시와 강고트리 구간은 엄청난 홍수로 대부분의 도로가 유실되어 실제 이동거리가 훨씬 길었다. 우회로마저도 자전거를 탈 수 없는 구간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우따르카시에서 대부분의 짐을 게스트하우스에 맡기고 간단한 배낭과 자전거만 가지고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강고트리로 향했다. 그러나 갠지스강 발원지인 고묵까지 가는 트레일이 대부분 유실되어 강고트리에서 자전거를 돌려야만 했다.축축한 바람이 마당 가득하고 서쪽으로부터 다가온 기운이 뼈와 살을 다독이고 있었다. 나는 201
무거운 쇠북소리는 땅 밑으로 가라앉았다. 영적인 분위기의 산맥과 계곡은 쉬지 않고 눈 녹은 물을 평원으로 흘려보내 감동의 큰 덩어리로 가슴에 남았다. 마치 몇 장 남겨놓지 않은 장편소설을 읽어 내려갈 때의 호흡과 같았다. 여행의 끝인 스리나가르를 목전에 두고 나는 고원의 마지막을 통과하고 있었다. 거의 보름을 달려온 길이지만 창공에 매달린 달의 반쪽도 따라잡지 못했다. 마치 부처님 손바닥을 헤맨 손오공처럼 광대한 히말라야의 한쪽 끝에서 놀라고 경이로워하며 한없는 매력에 경도되었을 뿐이었다.봉우리에 매달린 붉은 바위와 검은 흙은 흰
카길을 눈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원래 계획대로 ‘빠둠’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고 그대로 ‘스리나가르’로 갈 것인가. 어느 곳으로 가든 거리는 비슷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행을 마친 후의 일정이었다. 빠둠으로 갈 경우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나와야 하고, 카길에서 레로 가든, 아니면 스리나가르를 선택하든 차를 이용해야 했다. 만약 스리나가르로 갈 경우 델리까지 가는 여정도 만만치 않다. 레로 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카길에서 나는 남아 있는 체력과 여정을 신중히 점검했다. 깊이 생각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고민은 고민으로 끝내자
오르막이 시작되자 심장이 급격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허파는 뜨거워져 들숨과 날숨으로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음지와 양지의 기온차 때문인지 바람은 빛을 피해 아래에서 위로 쉬지 않고 불었다. 능선과 하늘은 조화로웠다. 두꺼운 물소리가 희미해지자 자전거는 계곡을 벗어나 가파른 오르막으로 내달았다. 어쩌다 트럭이 큰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는데 그때마다 나는 자전거 속도를 줄이고 길 옆으로 비켜서 이곳 특유의 화려하게 단장한 트럭을 구경하며 숨을 골랐다. 이곳을 지나는 트럭들은 파키스탄의 카라코룸하이웨이를 달리는 트럭들과 비교해서 틀린
레(Leh)로부터 님무(Nimmu)로 가는 길은 비교적 포장이 잘 되어 있었지만 꾸준한 오르막으로 자전거를 타는 데 힘든 길이었다. 날씨는 쾌적하고 빛은 눈부셔 마을과 산이 어우러지니 보는 즐거움을 놓칠 수 없는 구간이었다. 하지만 높은 고도와 쏟아지는 뜨거운 빛을 몸으로 감당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천하는 넓고 후세는 요원하다’는 말이 있다. 행동과 생각이 번거로워 고통스러울 때 이 말을 떠올렸다. 스스로 과거와 현재를 통달하여 환히 꿰뚫을 수 있는 혜안과 재주가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
타그랑라를 달려 내려와 해발고도 4,500m쯤 이르자 계곡이 보이고 물 흐르는 소리가 왕성하다. 곡선의 구릉이 계곡과 하천을 따라 줄지어 나타나고 눈앞에 보이던 설산들이 금세 뒤로 멀어졌다. 자전거 속력을 내다가 급히 브레이크를 잡는 경우가 많았는데 고지대의 평원과는 달리 아담하면서도 선이 굵은 풍광에 매료됐기 때문이었다. 유목과 경작을 병행하는 동티베트의 중앙 평원과 흡사한 풍경이었다. 지난밤 극심한 고산증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쾌족했다. ‘쾌족’은 마음 상태가 유쾌(快)하고 만족(足)스러움을 뜻한다. 시시로 일어나는 생
큰 파도가 지난 뒤 해변의 모래는 깨끗해진다. 낮은 구름이 비를 뿌리고 난 뒤 하늘은 더 높아진다. 푸른빛이 하늘에 꽉 들어차고 바람이 산에 머무르던 날, 잘 정비된 자전거를 가지고 충남 청양으로 출발했다. 명산의 구곡과 기암기봉이 부럽지 않은 칠갑산과 고찰 장곡사를 품고 있는 청양은 하늘빛·땅빛·물빛이 아름다운 고장이다. 대회에 참가한 의도는 일부러 어려운 도전을 하여 가벼운 삶이 흔들리지 않게 하며, 혼란스러운 일념을 곧추세우기 위해서였다. 경쟁은 신의 선물인 동시에 악마의 유혹‘랠리(Rally)’는 주어진 시간 안에 승부를 가